평소 샤프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는 재미난 기사를 오늘 자 매일경제 신문 CEO심리학이라는 코너에서
발견했다. 고대 교수의 분석이 "耳懸鈴鼻懸鈴" 같아 맘에 들지는 않지만  샤프의 기원에 관해 잘 모르던 것을 알게 해주었다는 의미는 크다.


[CEO 심리학] 샤프를 만든 사나이, 하야카와 도쿠지(上)

샤프(SHARP)는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다국적 기업이다. 샤프는 세계 최초로 탁상용 전자계산기, LCD 패널, 카메라폰 등을 개발했다. 현재 태양광전지(photovoltaics)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점하고 있다.

샤프는 1912년 일본에서 하야카와 도쿠지에 의해 설립되었다. 하야카와 도쿠지는 1915년 세계 최초로 기계식 샤프 펜슬을 발명했다.

그가 샤프 펜슬을 발명하기 이전에도 기계식 펜슬은 존재했지만 셀룰로이드(celluloid)로 제작돼 쉽게 부서졌고 사용하기가 불편했다. 따라서 하야카와 도쿠지는 오늘날 `샤프`라고 부르는 형태의 필기구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하야카와가 샤프를 개발하게 된 주요 동기로는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양부 같은 존재였던 스승이 하던 사업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것이다. 하야카와는 8세 때 요시마쓰(芳松) 작업장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요시마쓰 부부는 어려서부터 견습공 생활을 시작하게 된 그를 양자처럼 대해 주었다. 부모 품이 그리웠던 하야카와도 요시마쓰 부부를 평생 친부모처럼 생각하고 따랐다.

하야카와 도쿠지가 15세 때 금속공예품을 제작하던 요시마쓰가 연필 공장 사업에 새롭게 도전했다. 하지만 연필심을 연필 중심부에 심는 과정에서 불량품이 많이 생겨 결국 요시마쓰는 공장 문을 닫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하야카와가 샤프를 개발해 판매한 것은 양부와도 같았던 스승의 연필 사업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샤프(sharpㆍ날카로운)`라는 단어가 시사하듯이, 내면의 공격성을 승화시키는 것이다. 하야카와는 매우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술주정이 심한 사람이었다. 따뜻하고 인정 많았던 어머니는 남편의 술주정을 견디다 못해 결국 집을 나가 버렸다. 그 후 새로 들어온 계모는 하야카와와 채 열 살도 차이 나지 않았지만 심하게 그를 학대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야카와는 계모에 의해 하루에 17~18시간씩 노동을 강요당했다.

또 계모는 그가 집안에서 방귀를 뀌었다는 이유로 한겨울에 재래식 화장실에서 그를 발로 차서 빠뜨린 후 차가운 우물물을 뿌려 의식불명 상태에 빠뜨리기도 했다.

따라서 `언제나 날카로운 연필(Ever-Ready Sharp Pencil)`을 모토로 제작된 샤프는 하야카와 도쿠지의 공격성이 창조적으로 발현된 예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교체 가능성(replaceability)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것이다. 17세 되던 해에 하야카와 도쿠지는 집에서 우연히 약을 찾다가 자신의 입양계약서를 발견했다. 하야카와가 태어난 직후 그의 친부모는 모두 폐병에 걸렸다. 그들은 아기를 양육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야카와를 입양 보내야 했다.

훗날 결혼을 계기로 그는 소속 가문을 친부 쪽으로 변경하려 했다. 하지만 양부가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샤프는 하야카와가 소속 가문을 교체하는 데 실패한 후에 탄생한 작품이다. 샤프는 `기계적인 방법으로 축(軸) 안의 연필심이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된 심 교체 방식 필기도구`다. 연필에서는 연필심을 교체하는 것이 불가능한 반면에 샤프에서는 연필심을 교체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처럼 샤프는 개인(연필심)과 소속 가문(필기구)의 교체 가능성에 대한 하야카와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승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CEO 심리학] 샤프를 만든 사나이, 하야카와 도쿠지(下)

창업 후 1923년 8월까지 하야카와 도쿠지의 샤프 펜슬 사업은 정말 잘나갔다. 약 200명의 종업원들에게 연간 보너스로 20개월치 급여를 지급할 정도로 순이익 규모가 컸다. 공장도 계속해서 증설해 나갔다.

하지만 1923년 9월에 일어난 관동 대지진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대지진으로 인해 사랑하는 두 아들과 아내를 모두 저 세상으로 보내게 된 것. 종업원들 중 거의 3분의 2를 잃었다. 게다가 공장도 사실상 복구가 힘들 만큼 파괴됐다.

대재앙 시기에 그의 사업 파트너는 악의적으로 투자금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자 하야카와 도쿠지는 상식적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결정을 내린다.

하야카와 필생의 역작 중 하나인 샤프 펜슬에 대한 모든 사업권을 사업 파트너인 나카야마 다이치(中山太一)와 나카야마 도요조(中山豊三) 형제에게 넘긴 것이다.

하야카와 도쿠지는 어린 시절에 계모에게 학대를 받은 탓에 다른 사람들에게 정당한 요구조차 하기 힘들어했다. 특히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결벽증이 의심될 만큼 기피했다.

그는 나카야마 다이치 형제처럼 착취적인 사람을 만나면 과거에 자신을 학대했던 계모에게 저항하지 못했던 것과 같이 무기력한 모습을 반복하곤 했다. 게다가 그는 샤프 펜슬에 대한 모든 권리를 나카야마 다이치 형제에게 넘기는 대신 빚을 탕감 받는다는 조건의 계약서를 받아내지 않아 나중에 더 큰 화까지 당했다.

하야카와 도쿠지가 빚을 변제했다는 확인서를 고의로 써주지 않았던 나카야마 다이치 형제가 나중에 그에게 소송을 제기해 결국은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투자금마저도 강탈해 간 것이다.

관동 대지진은 이처럼 하야카와 도쿠지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 갔지만 그의 인간애만큼은 훼손하지 못했다. 관동 대지진 당시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을 공격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그러자 죽창과 칼로 무장한 일본인 자경단은 조선인을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이때 조선인으로 오인 받아 죽은 중국인만도 700명이 넘는다. 특히 이 시기에는 조선인을 몰래 숨겨주는 일본인도 신변을 위협받았다.

하지만 하야카와 도쿠지는 다른 직공들에게 발설하지 않도록 엄명을 내린 후 조선인 종업원을 자기 집에 숨겨 주었다.

하야카와 도쿠지가 가슴이 따뜻한 CEO로서 종업원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어린 시절 이노우에(井上) 할머니와 만난 인연 덕분이다. 그의 이웃집에 살았던 이노우에 할머니는 장님 무당이었다.

훗날 하야카와 도쿠지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계모에게서 벗어나 새출발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을 이끌어 준 사람이 바로 이노우에 할머니였으며 그 자신은 이노우에 할머니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를 평생 잊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나중에 샤프 전자로 재기에 성공한 하야카와 도쿠지는 독특한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하야카와 특선금속공장을 세운 것이다. 설립 당시에 이 회사는 일하는 종업원 9명 중 8명이 시각장애인이었다.

하야카와 도쿠지는 하야카와 특선금속공장이 철저하게 독립채산제로 운영되도록 하였다.

이 회사는 계속해서 성장해 1982년에는 샤프특선공업으로 사명을 바꾸면서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오늘날 이 회사에는 사원 100여 명 중 절반 이상이 신체장애자이며 이들은 산업용 로봇과 함께 일하고 있다.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를 살았던 샤프의 사나이는 21세기 기업 모델, 즉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기업`을 유산으로 남겼다.

[고영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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