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19. 13:56 생활
나이, 훈장처럼 가슴에 달면
2020년 3월 24일 중앙일보에 실린 글이다. 문영호 변호사라는 분이 쓴 글인데 너무 가슴에 와닿아 이곳에 스크랩해둔다.
“남들이 보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네
남들이 듣는 것을 나는 듣지 못하네
그러나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나는 보았네
남들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나는 들었네.”
열 살 남짓한 어린이가 읊은 자작(自作)시가 가슴을 때렸다. 오래전에 본 장애인 장기자랑 TV프로그램이었다. 지적 장애 때문인지 온몸을 뒤틀며 한마디씩 뱉는 걸 듣는 순간 숨이 막힐 듯했다. 그때의 감동을 떠올리며 그 시를 수없이 되뇌었다. 나이를 먹게 되면 그동안 보지도 듣지도 못한 걸 새롭게 보고 듣게 될지 마음 졸였다.
세월이 흘러 나이를 웬만큼 먹게 됐다. 언젠가부터는 새롭게 눈뜨는 것보다 잃어가는 것들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 산책길이 달라졌다. 어둠 속에서 앞서가는 사람 발걸음 따라잡기 힘든 때가 부쩍 늘어난 거다.
앞서가는 사람 추월하는 재미를 즐기던 게 엊그제 같고 지리산·설악산 구석구석을 수십 회 오르내렸건만, 지난 시절 기억을 떠올릴수록 마음 한 켠에서 서글픔만 솟아날 뿐이다. 몸이 마음 따라가지 않는 게 이미 한둘이 아닌 데도 더 늘어날 일만 남았다. 몇 배 더한 서글픔이 밀려오면 어찌 감당해야 하리.
평정심(平靜心)을 자주 잃게 된 것도 서글픈 일이다. 가까운 사람에게 괜히 섭섭해하거나 주변을 배려하는 데 인색해진 게 그런 경우다. 그런 변화의 근원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소외감을 주범으로 꼽고 싶다. 마음의 변화에 놀랄 때마다,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닐 거라고 자위해 본다. 같은 나이 또래 친구들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안타깝게도 화제가 한 가닥으로 모이지 않고 몇 갈래로 쪼개지는 게 그런 조짐이다. 각자 하고 싶은 말 하는 데 열중하기 때문이리라. 옆 사람 말 듣는 데 인색해지면 소통에 벽이 생길 게 뻔하다. 그렇게 한겹 두겹 벽을 쌓으면, 나이를 먹을수록 소외감의 늪으로 한 걸음씩 더 들어갈 수밖에 없다.
솟아나는 서글픔을 속으로 삼키면서 먹는 나이지만, 한 살씩 더해질 때마다 나름대로 얻는 게 생긴다. 긴 겨울이 끝날
무렵 봄을 기다리는 설렘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삶의 활력소 아닌가. 하지만 그 길목에 꽃샘추위와 함께 불어대는
바람만은 싫었다. 그런데 나무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려면 바람이 흔들어줘야 한다는 거다. 바람이 없으면 나뭇가지 끄트머리까지 땅속 물기를 빨아올릴 수 없다니, 얼마나 고마운 바람인가.
자연을 대하는 생각이 바뀌니 풀 한 포기도 달리 보였다. 산행길에서 가파른 바위 틈새로 힘겹게 뿌리 내린 채 뻗어
올라 백 년 넘게 버텨온 소나무와 마주칠 때마다 숙연한 마음으로 쓰다듬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늠름하게 뻗은 나무보다 발길에 치여 죽은 나무가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앙상한 밑동만 남아 오르내리는 등산객의 발걸음을 온몸으로 지탱해 주지 않는가. 살아서 눈길도 받지 못했을망정 죽어서 제 몫의 몇 배를 다하는 잡목의 헌신 앞에서 숙연해졌다.
우쭐해 하는 마음을 내려놓게 된 것도 나이 먹은 덕인가 싶다. 추운 겨울 서울지하철 잠실역 입구 인도 바닥에 엎드려 찬송가를 틀어 놓고 구걸하는 지체장애인과 마주친 건 오래전의 일이다. 첫눈에 들어온 그의 몰골은 고달픔 자체였다. 두 다리가 없어 엎드려 길을 쓸 듯이 기어 다녔으니, 바닥의 냉기가 온몸에 파고들었으리라. 사무실 도착 후 일을 시작하고 나서도 그의 모습이 떠오르면 심란해졌다. 행인들이 던져주는 동전 몇 닢으로 연명(延命)하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진 것이 사람 목숨이라 끊지 못하는 걸까. 이 넓은 세상에서 그가 누리는 공간은 어디까지일까.
출근길이 바뀌고 그를 잊은 채 몇 해가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며, 그가 이어가는 삶이 그 누구보다 치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쩡한 몸과 허우대를 가지고 태어난 내가 꾸려온 삶과 그의 삶을 무슨 잣대로 비교한단 말인가. 뭇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차가운 길바닥에 몇 시간이라도 누워있을 자신이 없는 내가, 과연 그를 동정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그가 겪고 있는 시련에 훨씬 못 미치는 시련 앞에서 나는 좌절할 뻔하지 않았던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자신이 초라해지고 그를 동정한 것이 부끄러워졌다.
해 바뀌면 먹어야 하는 나이를 훈장처럼 가슴에 달수는 없을까. 한 살 나이 먹을 때마다 타인의 치열한 삶에서 이름 없는 잡목의 헌신에서 뭔가 깨닫는 그런 혜안(慧眼)을 하나씩 더 보태게 된다면, 나이가 훈장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훈장을 달게 되면 밀려오는 서글픔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을 테니까.
[법의 길 사람의 길] 문영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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